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同正公系 成昌公 家門사람들
작성자관리자(test@test.com)작성일2011-12-28조회수16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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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同正公系 成昌公 家門사람들

 

龍川分系: 始祖公 14世孫인 同正公系의 自精公께서 寧越에서 安州로 移住하신후 16世孫 致宗公께서는 宣川으로, 22세손 泰弘公은 義州로, 24세손 道心公은 龍川(용천군 동상면 건룡동)으로 移住 定着하여 이른바 同正公系 龍川分系(가칭)를 이루셨다.

中興祖 26世 成昌公: 龍川分系의 中興祖라고 일커를수 있는분은 26世 成昌公(1873-1925)인데 이분은 道心公의 次男 大佑公의 3男이시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22歲까지 銅山里, 宣川 峰洞, 鉢山등 遠近의 書院 書堂에서 修學하시어 小學 大學 孟子 論語는 물론 詩傳 書傳 周易등의 舊學問과 算數 生理 博物 등 開化期의 新學問도 통달하신후 鐵山, 良策洞, 乾龍洞등의 書院 書堂 등에서 訓長으로 계시어 인근 지방에서 큰 선비로 존경을 받으시고 家産도 크게 늘리셨다. 成昌公은 슬하에 長男 承甲, 2男 承坤, 3男 承俊, 4男 承煥등 4子을 두셨는데 長男과 2男에게는 15세까지 書堂 書院을, 3∙4남에게는 新制度의 中等學校를 각각 마치게하여 家門의 上向移動을 促進시키셨다.

27世 承甲公과 率家 越南: 1925년 成昌公 별세후 27世인 長男 承甲公(1895-1973)이 家業을 계승하여 自作農地主로 계셨는데 8.15 해방 다음해에 북한 공산정권의 土地改革으로 小作用 農土를 빼앗기고, 1948년 5월에는 地主階級이라고 歷代로 근면성실하게 일구어놓은 고향에서 하루아침에 숙청당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동년6월에 부득히 率家(5子) 월남하여 서울에 정착하셨다. 承甲公은 슬하에 長男 丁甫, 2男 春甫, 3男 英甫, 4男 文甫, 5男 仁甫등 5子와 2女를 두셨는데, 2女는 모두 북한에 殘留하여 離散家族이 되었다.

北韓 殘留 後裔 全無: 한편 成昌公의 2남 承坤公과 3남 承俊公은 다 같이 1944년에 病死하셨다. 그후 承坤公의 獨子 亨甫는 기독교 長老였는데 북한에 남았다가 6.25전쟁시 反動分子로 처형되었고, 承俊公과 承煥公의 가족은 모두 일찍 월남하였으므로 北韓에는 成昌公의 男子 後裔는 全無하게 되었다.

27世 承煥公: 成昌公의 4男 27世 承煥公(1912-1999)은 龍川分系 사람으로는 처음으로 官界에 進出한분으로 1933년에 滿洲 安東세관에 入關하여 10여년간 근무하셨다. 그뒤 滿洲 錦西에서 和同公司의 社長에 취임하여 사업에 크게 성공하셨다. 1945년 해방후 귀국하자 곧 上京하여 韓國 稅關 창설에 참여하여 군산. 서울. 마산. 여수 稅關長등을 역임하셨다. 公은 당시 세관에서 關稅法의 제1인자로 1951년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GATT 즉 ‘관세 및 무역에관한 일반협정’에 관한 국제회의에 한국대표로 6개월간 참여 하셨고 1950년대 말에 “關稅法 解義” 上下권을 저술하시고 1964년경 退官하셨다.

28世 春甫宗親: 成昌公의 孫子며 承甲公의 2男인 28世 春甫종친(1923-)은 龍川分系에서 祖上傳來의 農耕社會의 傳統에서 벗어나 産業社會의 새흐름을 타고 家門 最初로 ‘富貴’의 宿願을 이룬 분이시다. 1945년 해방 前 만주 奉天(沈陽)에서 鋼鐵會社의 重役으로 계시다가 1947년에 上京하여 철판 판매업을 시작으로 국영 대한제철의 특약점이 되면서 1957년에 ‘한일철강주식회사’를 창립, 1973년 포항제철(주) 판매대리점으로 선정되고, 1977년 서울과 포항에 鋼管工場 設立, 1988년에는 溫山에 工場 설립후 한일철강(주) 기업을 공개하셨다. 그 후 2002년까지 인천 남동공단에 3개의 파이프공장을 설립하고 철강수출도 개시하셨다. 2003년에는 仁川에 한일철강주식회사와는 별도 법인으로 파이프제조부분을 ‘주식회사 하이스틸(Hi-Steel)’을 새로 설립하고 그 산하에中國 江蘇省 江陰市에 강관 생산을 위한 현지법인 ‘한일강관유한공사’를 설립하였으며, 또한 平澤에 코일센터도 설립하셨다.

이와 같이 강철제품의 판매, 생산, 제품의 다양화는 물론 해외 수출의 다변화로 社勢가 날로 發展하어 한국 굴지의 철강사업가로 대성하셨다. 春甫宗親께서는 철강事業외에도 장차 宇宙時代의 개척자가 될 어린이들에 대한 교육목적으로 2004년부터 2007년까지 私財 300여억원을 투입 하여 양주군 장흥면 석현리에 私設로는 우리나라 최대 규모의 天文臺를 건립하여 당신의 아호를 따서 松岩天文臺라 이름지어 公益事業에도 크게 공헌하고 계신다.

28世 英甫宗親: 成昌公의 孫子며 承甲公의 3男인 28世 英甫宗親(1931-)은 家門 최초로 將星의 班列에 오른 분이시다. 1953년 海軍士官學校 제7기로 졸업, 1960년 강원함(DE 72) 작전관으로 근무할때에 東海에서 NLL을 南下 侵入한 북한경비정을 격침시키고 1965~1966년 金井山艦(PC 708)함장때에는 연평도 근해에서 북한함정에 피납된 우리어선을 탈환하는 공훈을 세우셨다. 그뒤 제주함(APD-87)등 여러艦艇의 艦長職務를 마친후 國防大學院 敎授, 駐中武官으로 봉직하고 1976년에 准將으로 승진하셨다. 1977~1980년에는 해군제2사관학교장을 역임하고 해군본부 감찰감을 지낸후 1980년에 전역하셨다.

전역후에는 약 6년간 ‘(사)한국선급’(KR)의 국제 및 산업담당 상무이사로 국내외에서 많은 업무개척을 실현하셨고, 그 후 10년간은 한국컨테이너(공업) 협회 상근부회장으로 근무하여 한국이 장기간 컨테이너생산의 世界的 王座의 자리를 유지하는데에 크게 기여하였고 1995년에 ‘한국컨테이나 공업 15년사’를 저술하셨다.

英甫종친은 宗親會업무에도 다방면으로 봉사하여 일찌기 서울지역종친회장을 거쳐 2002년12월부터 중앙종친회의 13대 전임회장의 잔여 임기와 2007년3월까지 14대 회장을 역임하여 행정제도를 정비하고 ‘선산회복’을 시도하고 시조공묘역 진입로를 계획하는등 종친회에도 많은 업적을 남기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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