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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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법학의 아버지 효당 엄상섭(嚴詳燮)
작성자관리자(test@test.com)작성일2011-12-27조회수3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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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큰 인물 효당 엄상섭(嚴詳燮)

 

1960년 5월 3일 오후 2시, 역사적인 4.19혁명이 일어 난지 보름 낫짓, 이 땅에 큰 별이 떨어졌다. 효당(曉堂) 엄상섭(嚴詳燮) 선생이 그 분이시다.

제4대 정.부통령후보 유석 조병옥 박사마저 그해 2월14일 미 월터리드병원에서 수술중 서거하였지만 민심은 이미 야당으로 흘렀다. 3월 5일 한강백사장에 10만 인파가 모이면서 4.19 학생혁명의 씨앗은 이미 잉태하고 있었다. 효당 엄상섭을 태운 찦차를 에워싸고 학생들은 애국가를 부르면서 앞을 선도 해 갔다. 효당은 그 날 종로서에 연행되어 나와서 이미 천심의 움직임을 읽고 흥분해 있었다.

4.19학생 혁명은 새로운 역사로의 전환을 의미하며 그 중심점에 효당이 있었다. 효당은 당시 제4대 민의원(국회의원)으로 제2공화국 개헌안의 기초를 맡았던 헌법기초 위원장이었기 때문이다. 자유당 말기 민주당 소속 국회의원으로 반독재 투쟁에 앞장서서 고군 분투 했던 효당은 그 기력이 소진 된 때문인지 그가 그토록 염원했던 새로운 내각제 공화국의 출범을 보지 못하고 타계했다. 향년 53세. 개헌안을 만드는 과정에서 헌법기초 위원장으로 대체토론을 이끌다가 겹친과로로 쓰러졌으니 이 얼마나 비통한 일인가.

국회장(國會葬)으로 치러진 그의 영결식장은 눈물바다였다. 장면(張勉)을 비록, 곽상훈(郭尙勳, 박순천(朴順天) 등 민주당 인사들의 애도사가 이어졌고, 4.19학생 혁명의 부상자를 대표했던 서울대 김상훈군의 조사에 이르러서는 그 슬픔이 극에 달했다.

△ 빈농(貧農)의 아들로 태어나다

효당은 1907년 전남 광양군 진상면 섬거리에서 빈농인 엄주환(嚴柱煥)선생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 해는 우리 역사에서 잊지 못할 헤이그 밀사 사건으로 고종이 비분의 양위를 했던 해이기도하다. 9세때 부친을 여윈 효당은 더욱 찌들어진 생활 속에서도 어머니 주신덕(朱新德)여사의 비장한 결심으로 13세때 서당으로 들어가게 된다. 효당은 당시 어머니가 “이러다가 문 닫는 집안되겠다. 상섭이 만이라고 가르치자”라고 가형(家兄)에게 했던 말씀을 늘 기억했다고 한다.

1년간 한문을 배운 효당은 이듬해 신학문을 배워야 한다는 부친의 유지를 받들어 때마침 신설된 4년제 보통학교에 들어갔고 졸업과 함께 전남사범학교 특과에 입학했다. 학비를 대주는 사범학교를 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도 빈한했던 가세와 무관치 않다.

2년후 20세라는 약관의 나이에 초등학교의 교원이 된 효당은 29세까지 영암 벌교등에서 교사 생활을 했고 그 사이 26세 되던 해에는 부인 주임덕(朱任德)여사를 맞아 가정을 꾸린다.

교사 생활 하면서 법관의 뜻을 둔 효당은 독학 끝에 32세 되던 해 마침내 일본 최고의 시험인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하게 된다. 대학에서 정규 법학을 전공한 것도 아니고 어려운 가운데 그것도 일제치하에서 독학으로 고시에 합격했으니 가히 천재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 일제 치하에서의 검사 생활을 후회

1939년 첫 임지인 원산에서 검사 생활을 시작한 효당은 그러나 해방이 되기까지 4년간의 일제 검사 생활을 한없이 후회하게 된다. 효당 자신이 쓴 <자필이력>중에 나오는 부분을 인용해 본다.

“ 이 검사 생활, 이것이야 말로 왜정 압력하에서 독립운동에 신명을 바치시던 애국지사들에게 대하여는 지금도 면목 없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필자의 공사(公私) 생활에서 마음에 꺼림칙한 일은 거의 없습니다만 왜정 하에서의 검사, 즉 고관을 지냈다는 것만은 한없이 후회되는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8.15 해방과 동시에 굳은 결심을 했던 것입니다. 다시는 절조 없는 행동을 아니 하겠다고. 이 때문에 고집불통이라는 평을 듣게 된 모양입니다.”

효당의 일제 치하에서의 검사 생활은 그러나 특별히 비난 받을 만한 구석은 없다. 무엇보다 독립투사들을 대상으로 하는 사상 사건을 취급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효당은 일제의 창씨개명도 거부했다. 당시 한국인 고위관료로서는 감내하기 힘든 해직이나 징계의 위험이 도사린 결정이었지만 그는 두려워하지 않았다. 효당은 한걸음 더 나아가 고향의 형제 가족들에게 마저 창씨 개명을 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효당이 일제 말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함흥형무소에서 수감중이던 국어학자 이희승(李熙昇)선생을 풀어준 일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 정치가로의 효당

해방이 되면서 미군정 검사로 활동한 효당은 정부 수립 후 서을 지검 차장, 대검검사, 부산지검장등을 거친 후 변호사로 활약하다가 중앙대와 동국대에서 형법을 강의했고 1950년 초에는 홍익대학 학장에 취임했다.

효당이 정치에 입문한 것은 변호사 생활 8개월만인 1950년 5월30일 선거였다. 제2대 민의원을 선출하는 이 선거에서 효당은 고향인 광양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당선됐다. 효당이 정치에 발을 들여 놓게 된 동기는 혼란기에 있었던 국가의 재건사업 때문이었다.

제헌 국회의 경우 애국투사들로 채워져 민족정기를 살리는데는 기여 했으나 조국의 재건 과업에는 역부족이 던 것이 사실이었다.

제2대 국회의워능로서 효당의 활약은 실로 눈부신 것이었다. 5.26 정치 파동으로 풍찬노숙하며 나라의 민주 발전을 위해 분투한 효당은 이승만 독재 정권의 표적이 될 수 밖에 없었다.

1954년 국회 타임스가 발간한 <2대 국회 의정 4년의 실록>편을 보면 효당은 명실 공히 2대 국회를 움직인 유일무이한 인물로 묘사하고 있다.

“엄상섭씨와 같은 의원이 다섯 사람만 있었던들 국회가 오늘날과 같이 무능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것이 뜻 있은 사람들의 냉정하고 양심 있는 평이다. 국사를 좌우하는 중대 문제가 있을 때마다 그 담대하고 심도 있는 씨의 재능은 비상한 광채를 띄고 발휘된다. 국민방위군 사건, 서민호(徐珉濠)사건, 중석불(重石弗)사건, 양원제 개헌안 반대 등을 통해서 씨의 진취성 있는 활동은 현저하게 드러났다. 그는 대한민국의 불운을 초래하는 , 썩어 들어가는 독소를 보기 좋게 수술하는 명인이다. 그는 또한 여하한 정치적 억제나 압력에도 눌리지 않으며 두려워 하지 않는다.”

이 정도면 당시 국회에서의 그의 위상과 활약이 어느 정도 였는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같은 해 중앙경영연구소가 펴낸 <제2대 민의원 업적과 인물고>(김종범 편저)엔서도 효당에 대해 극찬하고 있다.

“엄상섭은 야당의 투사로서 두뇌가 명석하고 이론이 정연하여 국회에서 이론 정통파라는 별칭이 있으며 그의 한번 발언은 왕왕 수십표를 좌우했다”

그런 효당이 3대 민의원 선거에서 낙선한다. 이승만 독재 정권의 공작 때문임은 두말할 필요없다. 당시 이승만 정권은 젊은 투사인 엄상섭, 김영선, 태완선 3인방에 대한 낙선공작을 집중적으로 펼쳤다. 투표함을 통째로 강물에 던졌다면 그 무슨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의 이야기냐고 웃어넘길지 모르나 당시는 엄연한 사실이었다. 그 당시 선거 유세 때 불리던 노래는 지금도 광양 이성웅 시장은 중2때 불렀던 노래라고 뚜렷이 기억하고 있다. “ ... 돈벌이 벼슬 다툼 꿈도 안 꾸고 이 나라 바로 잡을 우리 엄상섭 보내자 국회로 우리 엄 상섭...

1955년 민주당 창당 발기인이 된 효당은 4년간의 분루를 삼키고 4대 국회에 서울 용산 갑구에서 출마하여 당선됐다. 그리고 4.19 혁명으로 드디어 민주당 천하가 되는 문턱에서 유명을 달리했던 것이다. 결과론일지 모르지만 효당이 조금만 더 살아있었어도 장면 정권이 그렇게 허약하지도 또 허무하게 무너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것은 필자의 추단이 아니라 당시 민주당 인사들의 애기였다.

정치가로서 효당은 청렴결백하고 대의명분을 존중하며 권모술수를 증오한 인물이었다. 또한 불의를 보고는 참지 못하는 성격에 신념이 강하고 지조가 견고한 분이었으니 오늘의 정친인들에게 참으로 귀감이 될 분이다.

효당의 주요 업적은 △국민 방위군 부정사건의 적발 △국회법 개정에 의한 국회의 민주화와 능률화 실현 △수많은 법률안의 정비 △ 내각책임제 개헌안 기초 △의안 심의에 있어 사리의 규명과 과오의 시정 △호헌 결의의 기초 등이 꼽힌다.

△ 한국 형법학의 아버지

정치가로서 큰 인물이었지만 효당은 한국 형법학의 아버지로 불릴 만큼 형법분야에서는 탁원한 존재였다. 새로운 형법안의 초안을 기초한 효당은 국회법사위원장으로서 이 법을 심의, 의결하는데 있어서도 주도적 역할을 하게 된다. 효당은 형법전의 기본사상 정립에서부터 각 조문의 구성과 배열 및 세세한 자구 수정에 이르기까지 직접 관여했고 심의과정에서도 동료의원들에게 형법의 근본 원칙과 내용을 설명하고 총론과 각론의 연계 및 신생독립국가에서 있어야 할 조문과 형법의 민주화 실현을 위한 조문마저 일일이 챙기는 등 결정적 역할을 했던 것이다. 이는 국회 속기록에 상세히 나타나 있다.

효당은 형사소송법의 제정에 있어서도 인권보호에 심혈을 기울여 구속적부심사제를 도입하는데 앞장섰고, 간통죄의 쌍벌제 적용과 중혼금지 등을 형법에 도입함으로서 여성의 인권보호에도 큰 공헌을 하였다. 효당을 한국 형법학의 아버지라고 부르게 된 것도 이 때문이다. 효당은 자신의 법 이론과 정치사상을 담은 정치평론집 <권력과 자유>라는 단행본을 낸바 있는데 이 단행본 외에도 수많은 법학 논문을 발표하여 법률가로서 사상의 건조(建造)를 탄탄히 한 인물이었음을 알게 한다.

효당은 또 그가 검사로 재직하던 시기에 <검찰제도의 신구상>이라는 글을 발표한 바 있다. 이글은 우리나라 형사사법제도의 초기 형성과정을 밝혀준다는 점에서 법제사적 의미가 매우 크다. 더구나 효당은 검찰관이라는 입장엔서 글을 적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특유의 공평무사 정신을 잃지 않고 있음을 보여 주었다. 효당은 검찰의 독선과 독주를 방지하기 위한 검찰위원회의 설치를 제안하고 있는데 오늘의 시점에서도 효당의 앞을 내다보는 식견의 폭과 깊이에 대해 감탄을 금 할 수 없게 한다. 이 때문인지 건국 당시 원로 법조인이었던 선우종원 변호사는 월간동화 1996년 1월호에 실린 기고문에서 우리 검찰의 두 기둥을 엄상섭과 김익진검사라고 갈파하고 있다.

이 같은 균형감각과 탁월한 식견은 효당으로 하여금 한국에서 법치주의와 민주주의가 실현되기 위해서는 정치권력에 대한 제한이 제도적으로 보장되어야 한다는 점을 굳게 믿게 했다. 효당이 대통령 중심제에서 내각 책입제로 바꾸는데 주도적 역할을 하게 한 것도 이런 연유에 기인한다.

△ 인각적 면모의 효당

효당은 본래 사범학교 시절부터 문학에 뜻이 있었다. 문학 소년으로 글쓰기에 심취해 있었던 효당은 특히 영문학에 매료돼 결혼 후 1년간 동경에 유학하기도 하였다. 이 때 고학으로 영문학을 통해 서양문물에 접하면서 얻게 된 민주주의와 법제에 대한 관심이 법률공부로 이어지게 됐고 마침내 사법고시에 도전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효당은 수많은 법학논문과 정치평론 외에도 14편의 주옥같은 시를 남겼다. 법 이론과 같이 딱딱한 내용의 논문이나 평론 등에서도 수려한 문장 솜씨를 보였던 효당은 특히 시에서는 뛰어난 서정성으로 섬세한 글쓰기 솜씨를 보여 주었다. 효당은 9남매를 두었는데 생사를 가늠치 못했던 6.25 피난시절의 임자도에서 세 아들을 이질로 잃는 슬픔을 겪는다. 이 때 남긴 것이 추도 3자라는 시다.

追 悼 三 子

너희들 맡아 볼 일

아비가 대신 맡으련다.

다난(多難)의 조국이요

사선(死線)에선 동족 들이다.

이 아비야 늙건 말건

분골쇄신 다하련다.

자식들에 대한 짙은 애정과 조국애가 섬섬히 묻어나면서 그의 내면세계를 읽게 한다. 효당은 몸가짐에서 단아했고 청렴함에서 선비의 정신을 느끼게 했다. 이승을 하직 하던 날에도 허술한 몇 칸 집에서 잿밥이 없어 저녁거리를 걱정하게 한 지사(志士)다.

4.19혁명이후 정치보복을 예견한 효당은 당시 자유당 온건파 이재학 부의장에게 만약 민주당이 집권하여 정치보복을 하면 탈당을 해서라도 막을 터이니 다시 자유당을 야당으로 키워가는데 힘을 합하자고 굳게 약속을 했다고 이재학 부의장은 회고록에 적고 있다. 원칙과 정치사리를 위해 두려움을 모르던 그였지만 한편 끝없는 정치보복의 망국적 병폐가 무엇인지를 미리 내다본 효당은 미리 그 싹을 자르고 몸을 던져 이를 지키려했던 그를 보고 이재학씨는 자기가 존경하는 가장 멋진 정치인이었다고 회고 하고 있다. 4.19이후에 내각책임제가 성공하려면 양당제가 자리 잡혀야 한다는 정치적 신념 때문에 이미 입신양명의 길은 버린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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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리에 따라 행동하며 어디까지나 공명정대하여 무슨 일이든지 시작하면 뜯어고치고야마는 행동원칙을 가졌던 효당, 어떤 정치적 억제나 압력에도 굴하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았던 효당,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과 견고한 지조를 가졌던 효당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그리고 엄문을 자랑스럽게 한 우리의 큰 거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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