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嚴皇貴妃와 家門의 사람들
작성자관리자(test@test.com)작성일2011-12-23조회수2986
파일첨부 엄황귀비.JPG

 

 

嚴皇貴妃 家門의 사람들

 

조선 영조때의 명문필가이며 楊武公臣慶德將인 21세손 諱漢朋공의 장손자 性復公은 아들 5형제를 두었는데 그 중 장남 載和公은 두형제 즉 鎭弼公과 鎭國公을 두시고 삼자인 載祐公은 아들 鎭一, 鎭三, 鎭五의 3형제를 두시었다.

증 가선대부 내부협변인 鎭弼公은 무자로 동생 鎭國公(절충장군 증 통정대부 비서원승)의 장남인 仁永公을 양자로 입적하여 아들 柱承公과 柱益公을 두시었고, 柱益公은 3남 1녀를 두시었는데 장남 敬燮公은 장남 圭白公을 두시었다.

25세손 鎭國公은 仁永, 夏永, 斗永의 3남과 녀식 형제를 두시었는데 장남 仁永은 형인 鎭弼에게 출가시켰다. 25세손 鎭一公은 2남 3녀를 두시었는데 차남이 俊源公이며 공의 장남 柱明公은 출가를 시켰다. 또한 鎭一公의 동생 鎭三公은 2남 3녀를 두시었는데 장남 鳳源公은 무자로써 준원의 장남을 양자로 맞아 들이었고 장녀가 바로 純獻貴妃시다.

 

嚴皇貴妃( 조선조 마지막 황비, 여성교육 선구자)

26세손 순헌황귀비는 1854년 증 의정부찬정휘 鎭三公과 증 정부인 밀양박씨 사이에서 2남 3녀중 장녀로 출생하시고 소녀때 입궐하여 민비의 시위 상궁으로 선임되셨는데 민비와 닮았다는 인연으로 고종이 총애를 받았다. 민비 시해 후 더욱 고종의 총애를 더 받게 되어 고종의 셋째 왕저인 西吉를 출산 한 후 순빈는 1902년에 황귀비로 봉하셨다.

당시 황귀비께서는 나라의 개화와 발전은 신교육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특히 여성 교육기관의 설립이 필요함을 절감하시고 친가의 문중 선각자들과 협의한 결과 황귀비께서는 막대한 왕실 재산인 황실 토지 700만평을 희사하여 친정 재종질 嚴柱益公에게 그 운영을 계획 실천하도록 맏겼습니다. 그리하여 엄황귀비의 출자로 인해 1905년에 친정조카 엄주익 범무형판 육균참장으로 하여금 양정의숙이 설립되었고, 1906년 4월에 비의 오라버니 嚴俊源公으로 하여금 서울 자하골(현재 창성동)에다 진명여학교를 설립하였고, 5월에는 명신여학교(현재 숙명여고)를 설립하여 머리에 첨지를 쓴 정경부인 李貞淑씨를 교장으로 임명하였다.

또한 숙명학교는 일본식 현대교육으로 진명여학교는 서양식 현대교육으로 양정의숙은 한국식 현대교육을 실시하도록 특색 있는 교육을 하도록 하였다.

1907년 12월 26일 11세된 어린 영왕 垠公을 인질로 일본으로 데려 갈 때 친정조카(入系 한) 柱明(12才)으로 하여금 호종(扈從)하게 하였고 황귀비는 장티브스로 인해 1911년 7월 20일 향연 58세로 서거하였다.

 

俊源公(고종 때 武臣 교육자)

26세손 준원공은 증 내부협변 諱 鎭一公의 2남으로서 순헌황귀비의 4촌간이다.

준원공의 처음 관직은 알 수 없으나 1901년 6얼 2일 내장원 종수과장 한성부윤군에 임명되시고 1903년 11월에 육군부령에서 경무사를 거쳐 12월 2일에 육군참장에서 원수부 기록 총국장에 보임되시고 다음해 7월에 濟用司長을 겸임하셨다. 9월에 군제의정관,10월에 육균참모부2국장, 12월에는 刺任官三等에 추서되시고 1905년 9월에 勳二等에 특서되셨다.

1906년 5월에 典膳司長이 되시고 1907년 12월에 掌禮院 典禮에 서임되시어 정2품에 승계되었다. 이후 괸직을 그만 두시고 황귀비께서 설립한 진명여학교 초대교장과 학교 법인 진명학원의 초대 이사장을 역임하여 여성교육 사업에 전념하시다가 1938년에 서거하였다.

配位 정부인 인동장씨와 아들 주명공과 딸 3명을 남기셨다. 공께서는 엄문의 3번째 대동보 계유보(1933년)의 副有司를 맡으셨다.

 

春庭 嚴柱益公

1872년 6월 26일 26세손 인영공의 둘째 아드님으로 한성부에서 탄생하시니 엄비의 친정 재종질이 되십니다. 1900년에 통신원 전화과 주사로 관계에 투신한 후 1902년에 군부 포공국장, 8월에 한성부판윤, 1903년에는 군부협판이 되시고 다음해 5월에 육군참령에서 육군참장, 7월에 勳三等의 군무협변이 되셨다.

공께서는 동년 9월에 서구 문화를 받아 들여 신식교육 방법에 의한 민족교육의 필요성을 인식하시어 황귀비와 긴밀히 협의하여 뜻을 같이 하는 石丁 安鍾元, 李哲宇, 尹晶錫, 朴容淑, 張炫周, 金鎭賢, 韓晩容 등과 함께 양정의슥(현재 양정고)을 창립 발기인이 되었다. 1905년 기부금과 사재를 털어 서울시 도염동에 숙사를 건축하고 법률과로 전문교육이 시작되었다. 광무 9년 2월 20일 공께서는 사립 양정의숙 숙장에 선임되시었고, 양정의숙에 경제과를 증설하셨다. 양정의숙이 개교 3년만에 경영난에 봉착하게 되자 엄황귀비는 융희 원년(1907년) 5월에 경선궁과 양천왕국에 소속된 토지 200만평을 양정의숙에 하사받아 안전된 기본 자산을 확보하게 되어 발전의 계기가 되었다. 1905년에 공께서는 군제의정관이 되시고 1906년 2월에 육군법원장 (刺任官 二等)이 되어 황귀비 뜻에 따라 이해에 진명여학교와 숙명여학교를 설립하였으며, 1907년 4월에 다시 육군협번 자임관 이등에 서훈되고, 1907년 12월에 영왕 은공이 일본의 강압하에 유학 가실 때 특진관 주익공은 수학원 교관 柱日公 등 十人과 함께 배종하셨다. 이해 12월 30일 종2품 규장각 지후관에 직명되시고 이후 황귀비 거처인 경선궁 감무를 지내면서 서구문화를 받아들이는데 정진하셨다.

공께서는 1910년 이후에는 일체 관직을 떠나 교육사업에 전념하여 1913년 재단법인 양정의숙 이사장에 취임하고 이해 10월에 양정고등보통학교 교장에 취임하시어 인재 양성에 힘쓰셨다. 1931년 60才로 서거하시니 장자 경섭 차자 동섭 삼자 태섭과 여식 한명을 두셨다.

 

夏永公(高宗 純宗때 武臣)

26세손 휘 하영공은 1865년에 비서원승이신 鎭國公과 淑夫人 경주 석씨의 3남매중 2남으로 출생하시었고, 일찍이 궁중관직에 근무하셨다. 고종황제의 황귀비 엄씨와 재종 자매간이 되시며 주전 경위 국장으로서 황제를 친히 호위하셨다. 1906년 6월 23일에 직책상 각별히 공훈이 인정되어 勳四等의 八卦章을 받으시고 1909년 10월에 주전 경무관으로 특별히 승계되시고 大極훈장을 하사받으셨다. 하영공은 1911년 서거하시니 향년 44세였다.

 

柱明公(조선조말 영왕의 학우,교육자)

27세손 柱明公은 1896년에 원수 부총장이신 俊源公과 貞夫人 인동 장씨와의 사이에서 태어나서 황귀비 큰오라버니 鳳源公의 系子로 입계하셨다.

주명공은 12才 되든 때 황태자 영왕이 11才의 어린나이로 강제 유학 가실 때 함께 유학한 학우이기도하다. 일본 유학을 마치고 해방으로 귀국하여 군에 입대하고 육군 준장으로 병사사령관을 역임하시었으며, 황귀비께서도 왕실 재산을 하사하여 설립한 진명학원의 운영을 부친의 뒤를 이어 이사장과 진명여자고교 교장을 하셨으며, 양정숙의 이사도 지냈다. 해방 후 조국에서 국군의 간성으로서 또한 교육자로서 평생을 바치고 1976년 2월 16일 81才로 서거하였다.

 

敬燮公(근대 교육자 정치인)

28세손 경섭공은 1906년 3월 27일 고종때 군부협변을 지내신 주익공의 장남으로 출생하시어 양정고등학교를 거쳐 일본 동경의 법정대학교 경제학부 상학과를 졸업하신 뒤 문교재단 연합회장, 국정교과서 주식회사 이사 등을 역임하며 부친이 뒤를 이어 양정중학교 교사를 거처 1947년 6월 4일 제4대 교장에 취임하였다.

1947년 8월에 (재)양정의숙이사, 1949년 6월에 (사)문교재단 연합회 이사, 9월에 서울시 교육회 이사, 12월에 문교 서적 주식회사 감사역에 피선되었다.

이후 한때 유정회 국회의원으로 정계에 진출한바 있으며, 1963년에 (사)대한교육연합회 회장, 1964년에 대한 사립학교장회 연합회장에 중임, 국정교과서 이사에 피선되었다.

이상과 같이 교육사업에 직갑접으로 밀접한 관계가 있는 여러사회 단체의 요직을 역임하면서 학교장 취임이래 근 20년간 양정을 위하여 재단운영, 학교 경영, 교사의 신축 및 증축, 강당의 신축, 운동장의 확장 등 많은 업적을 남기셨다.

 

圭白宗賢

경성공의 장남인 규백종현께서는 1932년 출생하시었고, 1974년 2월에 서울대 대학원을 졸업하고 동대학교 물리대 교수로 있다가 덴마크 코펜하겐의 대학부속 동물박물관에서 해양식물학을 연구한바 있으며, 1973년 12월 3일에 교장에 취임하셨다. 또한 1996년 2월부터 2003년 8월까지 중학교 6대 교장직을 겸하였으며, 고교교장직은 2007년 12월까지 역임하시다가 은퇴하였다.

선생님의 주요 경력으로는 세계자원 및 자원보존연합(IUCN) 국내위원장, 1999년 3월 한국중등교육협의회 고문으로 계시며, 1998년 7월~2000년 7월까지 새교육공동체 위원회 대학위원으로 역임한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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