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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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적지/문중소개

복야공파 십성당 문중
작성자관리자(test@test.com)작성일2011-12-19조회수2340
파일첨부 십성당공 묘소.JPG

                           

                          복야공파 십성당문중

가. 문중약사

시조 내성군(奈城郡) 임의(林義)의 16세손인 십성당엄공(十省堂嚴公)흔(昕)께서는 복야공 5세 광(光)의 6대손인 총제공(摠制公) 11세 유온(有溫)이 십성당(16세 昕)의 5대조이며, 교리공(校理公) 13세 송수(松壽)의 중조이다. 총제공의 고손 용화공(用和公)의 장남이며. 모친은 안동인 김중성(金仲誠)의 여식이며. 부인은 무안박씨(務安朴氏)이다.

자는 계서(啓昭) 호는 십성당(十省堂)이다. 흔공(昕公)은 조선조 11대왕 중종 때 강직한 간관(諫官)이자 저명한 문장가로 역사에 기록되어 있고 , 단종 참화와 연산군 폭정에 오랫동안 기를 펴지 못하고 지내오던 엄문의 중흥을 이끄신 선현이며, 훈구파와 신진 사림간에 정쟁이 심할 때 시류에 타협하지 아니한 청렴 강직한 선비 정신은 대간(大諫)의 자리에 오래 머물지 못하게 하였다.

흔공(昕公)은 1525년 18세 때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고, 1528년 21세 때 식념문과에 갑과로 장원급제하여, 1528년 홍문관정자(弘文館正字) 저작(著作)을 지냈고, 1529년 22세 때 박사(博士)세자 시강원(侍講院) 설서(設書) 1530년 홍문관(弘文館) 수찬(修撰)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에 제수되었다.

흔공(昕公)은 홍문관 수찬이 된 다음날 언관(言官) 탄압중지와 파방(罷榜)을 요청하는 차자(箚子)를 올렸고,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에 제수 된지 7일 만에 작서(灼鼠)의 변(變)의 원흉 삼간(三奸)을 처벌하라는 상소를 올렸고, 1530년 23세 때 적간어사(摘奸御使)로 경기도에 파견되었다.

1531년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엔서 다시 홍문관(弘文館)으로 체직되었으나, 7년간 양천에 낙향하여 학문에 전념하면서 후학 지도와 시작(詩作)에 몰두하였다. 이 때 일일십성(一日十省)의 길을 걸으시며 호를 십성당(十省堂)으로 짓고 시문 십성당집(十省堂集)을 준비하였다.

김안로(金安老)가 사사된 다음 해인 1538년 7년 만에 전직보다 일품(一品) 낮은 홍문관(弘文館) 부수찬(副修撰)에 제수되어, 다시 옥당(玉堂)에 나가면서 품계가 다시 높아지고, 시강원(侍講院)이 되어 어전조강(御前朝講)에 나가 대학연의(大學衍義)를 강의하였다.

1539년 32세 때 홍문관 교리에 오르고, 천사종사관(天使從事官)으로 계실 때 단정한 용모와 법도 있는 예의 훌륭한 시문으로 중국 사신들로부터 탄복을 자아냈다고 하며 황화집(皇華集)에 흔공(昕公)의 시문이 많은 듯하다.

중종은 흔공(昕公)의 학식과 재질을 높이 인정하시어 왕세자에게 경서, 사서, 도의를 가르치는 세자 시강원(侍講院) 필선(弼善)에 제수되었으며, 1541년 홍문관(弘文館) 전한(典翰) 종삼품(從三品)에 오르신 흔공은 대신들이 대간(大諫)을 함부로 홀대한다는 상차를 올린 일로 유명하며, 출사한지 5년만에 지병으로 퇴직하고, 1543년 9월 19일 36세로 서거하니 세자(인종)가 흔공이 청백리임을 알고, 장례비 일체를 하사하여 양천현 백석동에 안장한 후 1969년 4월 2일 파주시 분수리 산 70-5로 천묘하였으며, 세자가 하사한 백비(白碑)에 석벽(石壁) 홍춘경(洪春卿)이 비문을 짓고, 이암(李岩) 이발(李潑)이 지석명(誌石銘)을 지은백비(白碑)기 현존하고 있다.

흔공(昕公)은 조선조 5백년간의 중신, 명신, 문장가들을 수록한 동국문헌록에 올랐고, 시중 한수가 가곡원류에 실려 있으며, 십성당집 상하권과 휘호 한폭이 국립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십성당 흔공의 후손으로는 자 준양도호부사 인술(仁述) 손동호교관

승의랑 후, 증손 사헌부감찰 성구(聖耈), 고손 예조판서 집(緝), 찬(纘), 집 등이 있다.

십성당의 묘소는 파주시 광탄면 분수리 70-8 직계손 종중묘지에 있으며, 시향대제는 교리공(校理公) 송수(松壽)와 함께 매녀 SDMAFUR 10월 첫째 일요일 10시에 종중제실인 십성제에서 거행하고 있다.

 

나. 문중 현황

조선총독부 토지조사부 작성시부터 토지등기법 시행이후까지 3대에 걸쳐 개인 명의로 유지되던 임야 약 10,000여평과 묘답 약 1,700여평, 종중묘지 약 300여평, 재실부지 15평, 재실 8평의 종중 재산을 종원 5명이 가 등기하여 내려오다가 직계손 종중재산을 종중명의로 관리하기 위하여 십성당 공계 직계손 모임인 직계손 친목회 명칭을 십성당공계 화순공 문중으로 등록하여 등기 관리하고 있다.

 

1) 문중현황

구분 회별

십성당공계 종친회

직 계 손

창립 연월일

1995. 1. 22

1977. 6. 3

등 록 일

1995. 2. 27

총 인 원

등록 인원

38명

22명

사무실 주소

회장 엄은섭

성남시 분당구 이매촌동

동부@ 501-902

회장 엄세용

서울시 강북구 미아9동

132-50번지

연 락 처

031-705-4079

017-371-8032

 

2) 총회 개최 현황

구분 회별

십성당공계 종친회

장 소

인 원

직 계 손

창 립

1995. 2. 27

제기동

38명

1977. 6. 3

매 년

시향일

십성재

28명

시향일

 

3) 역대회장

회 별

구분

십성당공계 종친회

직 계 손

성 명

계파

세손

재임

기간

성 명

계파

세손

재임

기간

엄은섭

십성

당당

28

엄세용

십성

당공

30

 

다. 조직

1) 현임원

구분 회별

십성당공계 종친회

직 계 손

지도위원

엄준용, 엄봉용

회 장

엄 은 섭

엄 세 용

총 무

엄 기 순

엄 화 용

 

2) 업적

십성당공계(16세 昕) 직계손 묘소는 연산 갑자사화시 엄숙의(嚴淑儀. 9대 성종 계비)의 둘째 오빠 긍천공(矜川公) (14세 誨:회) 사지공 13세 산수(山壽)의 차남으로 교리공[13세 송수(松壽)의 계자(系子)로 입양]께서 화를 당하고 십성당공께서 7년간 낙향하여 1년여 투병하다가 서거한 이후 10여대에 걸쳐 우리 집안을 크게 빛낸 성현의 보금자리였던 양천 백석동(현 등촌동)에 위치하였었다.

그러나 그곳은 1960년 서울시로 편입되면서 도시개발계획으로 인하여 1969년 을유년 4월2일과 5월 12일, 1973년 계축년 8월6일등 3차에 걸쳐 13세 교리공 송수(松壽)부터 28세 允燮에 이르기까지 20基 37위를 당시 운반 수단이 매우 열악하여 대형 비석과 상석, 문관석, 동자석, 기타 석물 등의 운반이 어려운 상황이었음에도 십성당공의 13대 종손 在錫(일명:基奭)이 파주군 광탄리 분수리 산 70-5로 천묘하고 미비된 석물을 추가로 갖추어 정비하였다.

그 후 26년이 지나면서 삼림 조성에 따라 임목이 울창하고 묘소의 일조량이 부족하여 잔디 생육이 어려우며 묘소가 산재하여 각위마다 시향 제물 운반과 제례의 어려움이 많아 1994년초부터 묘지관리 방안을 강구하다가 서구식 공원묘지형 종중묘지로 조성하자는 십성당 직계손 모임인 화순공 문중의 결의에 다라 1995년 4월 18일 300여평의 직계손 종중묘지를 허가 받아 28세 允燮 配 여산 宋氏와 29세 基春 配 密陽朴氏 지도하에 회장 30세 종손 世鎔을 중심으로 基性, 準鎔, 化鎔, 斗鎔 등이 종중 묘지 조성과 遷墓宗事에 헌신의 노력으로 1995년 7월 8일 종중묘지 980㎡를 4단 석축으로 조성하여 양천 백석동에서 파주시로 1차 천묘한 묘소를 26년만에 산재한 묘를 종중 묘지 한 곳으로 13세 송수(松壽) 교리공부터 28세 종손 允燮까지 28基 54位를 안장하였고, 종중 재실부지 48㎡를 조성하여 연와조 스라부조 28㎡의 宗中재실 십성재를 건축하였다.

휴전선 이북에 계신 십성당 고손 예조판서(20세 정헌공 緝)의 묘소는 장단군 장도면 두매리(꽃밭머리 관리자 이재순)에 십성당공 12대손 英燮의 묘소는 함남 영흥군 순영면 정자리에 계서서 종중묘지에 안장치 못함을 천추의 한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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