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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정치가’삼봉 정도전!
작성자관리자(test@test.com)작성일2014-04-03조회수1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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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가삼봉 정도전!

 

6백 년 족보에 얼룩진 혈흔(血痕)

처가(妻家)를 도륙한 개국공신들

 

억불숭유(抑佛崇儒)의 기치를 높였던 조선 개국 초기,

성리학은 국가 성립의 기본 강령이 되었고 유학은 생활의 근간이 되어 종교화 되었다.

공자의 기본 윤리개념을 모두 담고 있다는 유교 경전, 논어의 한 구절을 다시 본다.

예가 아니면 보지를 말고, 듣지도 말며, 말하지도 말라

그러나 기본 강령이 그들 스스로를 얽어 매버리고,

함정에 빠져버린 모양새가 되었으니,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한 가계의 혈통을 중요시 하는 풍속은 유교의 절대적 학문 체계이다.

불구대천의 원수라는 말은 유가(儒家)의 예기 편에서 나왔다.

이를 실증하듯 실제적 사건이 한 문중 역사에 6백 년 핏빛으로 남아 숙연하게 한다.

서얼(庶孼)의 기록이 처가의 족보에 기록되고,

이를 말살하여 차단하고자 처가를 도륙한 이들의 이면을 살펴보고자 한다.

조선을 건국한 일등공신 정도전(鄭道傳), 그와 건국사업에 함께 참여한

조영규(趙英珪),· 함부림(咸傅霖) 등 개국공신과 태종 때의 중신

하륜(河崙)은 건국 초기를 호령했던 막강한 권력가 들이었다.

여말선초 때에는 적서(嫡庶)나 양천(良賤)과 같이 혈통에 의한

신분차별을 주장하지는 않았으나, 유교가 국교화되면서

이들은 서얼 차별을 이미 예견하고 있었을까?.

해동잡록 성삼문(成三問) 편에 보면, ‘서자(庶子)가 적자(嫡子)를 싫어하는

태자들의 난이 일어나게 되어 (차원부가) ()들과 함께 주살되고 말았으니,

이때의 사실을 누가 감히 명백하게 변명할 수 있을 것인가? ’라 하여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이들 4명은 공교롭게도 연안차씨(延安車氏)의 외척 얼손(?)의 혈통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정도전은 어머니와 아내가 모두 연안차씨 공윤(公胤)

외예얼속(外裔?)이었으며, 특히 모계에 노비의 피가 섞여 있었다.

그는 고려 삼은(三隱)의 한 사람인 이숭인(李崇仁)을 자기와 함께 처세하지 않은 데

앙심을 품고 심복 황거정(黃居正)을 보내 유배소에서 장살(杖殺)했다.

안정복은 그의 문집 동사강목(17)정도전은 자기의 재주가 도은만 못함을 알고

꼭 죽이고 말겠다는 결심을 하였다고 한다. 도은의 시는 동문선(東文選)에 실려 있다라고 썼다.

이기(1522-1604)가 쓴 송와잡설(松窩雜說)에는 목은의 죽음에 대한 기록이 보인다.

병자년(1396) 여름에는 공이 여흥으로 피서(避暑)하기를 간절히 요구하여,

5월 초3일에 벽란(碧瀾) 나루에서 배를 타고 강을 거슬러 가는데,

호송(護送)하는 중사(中使)도 또한 와서 있었다.

7일에 여흥 청심루(淸心樓) 하류 연자탄(燕子灘)에 도착하여 배안에서 공이 죽었는데,

공의 죽음을 사람들이 많이 의심하였다.

대개 고려 왕씨(王氏)의 자손이 배안에서 많이 처치를 당했는데

이것이 모두 정도전과 조준(趙浚) 등의 술책이었으므로 공의 죽음에 대하여서도

여러 사람의 의심이 없을 수 없었다. 애통하도다.”라 썼다.

정도전에 대한 기록은 조선조 5백 년 금서(禁書)에서도 보인다.

북부여기(北扶餘記)를 저술, 우리의 상고를 밝힌 범세동(范世東)

그가 쓴 화동인물총기(話東人物叢記)에서 정도전은 제가(諸家)의 화해전(華海全),

비지(秘誌)를 거두어 불살랐는데 계유(癸酉) 겨울 깊은 산속까지 뒤져

감추어진 것을 하나하나 몰수하여 태웠다고 증언하고 있다.

그가 쓴 화동인물총기는 조선 500여 년 동안 금서(禁書)

금성 범씨(錦城范氏) 문중에서 목숨을 걸고 지켜졌다.

범세동은 들키면 멸족 당하니, 비장(秘藏)의 풍토가 생겼다 (같은 책 28)”라 하여

정치 탄압이 심할 때는 자고로 비기(秘記)로 하여 비장(秘藏)하였다

기록을 남긴 것을 보면, 우리의 상고 역사를 말살한 주역으로

당시 그의 위상이 얼마나 컸으며 공포감을 조성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또 한 예를 들어보자. 건국 초기 우승지 서선(徐選)

정도전이 총애하던 종에게 욕()을 본 일이 있었다.

연암집 제 3'서얼 소통(疏通)을 청하는 의소(擬疏)'에 보면,

분기를 가슴에 안고 있다가 정도전이 패망하자 서얼 금지법을 태종에게 건의하여

조선 5백년 한()을 만든 시발이 되고 있다.

그는 건국의 이론적 토대를 마련하는 등 위대한 공적을 세웠으나,

세자 방석(芳碩)을 추대하다가 1398(태조 7) 이방원에 의해

시행된 1차 왕자의 난에 최후를 마쳤다.

조영규는 일찍이 이성계의 사병(私兵)으로 종군, 전공을 세워 벼슬길에 오른다.

고려말 명문가인 연안차씨 차원부(車原?)의 동생인 견질(堅質)의 첩녀를 아내로 맞이하였다.

포은 정몽주(鄭夢周)는 차원부의 대고모 외손자로서 그와 인척관계에 있었다.

그러나 이성계의 문병을 마치고 돌아가는 정몽주를 선죽교에서 격살하는 데

주동적 역할을 하였다. 개국공신 2등에 책록되고,

예조전서에 올랐다가 1395년 병으로 죽었다.

하륜은 정도전과 같은 이색(李穡)의 제자이다.

1388년 최영(崔瑩)이 요동을 공격할 때 이를 반대하다가 양주로 유배되었으나

위화도회군 이후로 복관되기도 했다. 한때 정도전의 미움을 받아

계림부윤(鷄林府尹)으로 좌천되었으며, 정도전과 달리 이방원(李芳遠)을 적극 지지하여

1차 왕자의 난으로 정종이 즉위하자 정사공신(定社功臣) 1등이 되고

정당문학(政堂文學)으로서 진산군(晋山君)에 피봉되었다.

그는 태종의 우익으로 인사청탁을 많이 받고 통진 고양포(高陽浦)

간척지 200여 섬지기를 농장으로 착복하여 대간의 탄핵을 받았으나 공신이라 하여 묵인되었다.

치사한 뒤 함경도의 능침(陵寢)을 돌아보던 중 정평군아(定平郡衙)에서 죽었다.

함부림은 동원군(東原君)에 봉해졌고, 자헌(資憲)으로 팔도 감사를 지냈다.

1차 왕자의 난 때, 정도전과 더불어 왕자 방석(芳碩)을 옹립하였다는

혐의로 탄핵을 받은 일이 있다. 1408년에 형조판서가 되었다가 1410년 파직되었다

박동량(朴東亮 1569-1635)은 기재잡기(寄齋雜記)에서

부림의 나이 100세가 다 되어서 자손이 다 없어지고 종들이 모두 흩어져

온갖 고초를 다 겪으면서 구차하게 목숨을 이어 가다가 세조 때에 죽었다.

맏아들 우치는 후손이 없었고, 둘째 아들 우공 또한 후손이 없었으니...’라 했고,

이긍익(李肯翊 1736-1806)늙어서 병이 들었는데, 하나 있던 딸이 먼저 죽고,

주색을 싫어하여 첩을 두지 않았기 때문에 혹 조석을 궐하기도 하였다.

전에 친하게 지내던 기생이 와서 보니, 공이 헌 누더기를 입고 초석(草席)에 누웠는데,

뻣뻣한 종 하나가 옆에 있을 뿐이었다.

기생이 말하기를, “공 같은 호걸이 어찌 이렇게 곤궁하게 되었습니까.” 하니,

공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쳐다보면서 눈물만 떨어뜨렸다.’

연려실기술 태조조의 명신(名臣) 편에 썼다.

이들은 외척 얼손(?)의 혈통이라는 구조 때문에 구가세족이나

명분을 중요시하는 성리학자들로부터 백안시당하는 경우가 많았고,

4노가(奴家)의 하나라는 세인의 평을 받았다.

이성계(李成桂)가 유일하게 지우(知友)라 불렀으며,

두문동 72현이었던 차원부(車原?). 태조가 꿈속에서도 애타게 찾았다는

그는 일찍이 정도전을 비롯 이들 4명이 차씨(車氏) 외손의

서속(庶屬)이었음을 사실대로 족보에 기재하였다.

그 뒤 그들의 원한을 받아오던 중 1398(태조 7) 평산으로 돌아가려고

송원(松原)에 이르렀을 때, 하륜 등이 보낸 자객에게 형()들과 함께 타살되었다.

또한 처가 가족 및 일당 80여 인이 참살 당했다.

또 그들의 혈통이 차씨와 유씨의 족보인 차류보 車柳譜에 실려 있는 것에 분한을 품고

해주 신광사(神光寺)에 보관중인 보판(譜板)을 하륜이 불살라 버렸다는 기록이

조영규 인물편에 전해진다. 대동운옥(大東韻玉)에는 이들 4명이 그를 때려 죽였다고 썼다.

말을 하지 않고도 마음과 마음이 통하여 깨달음을 얻음이 이심전심(以心傳心)이다.

자신의 몸과 같이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이다.

이성계와 차원부와의 관계는 지기(知己)였다. 그런 그가 비명에 죽었다.

태종이 나중에 차원부를 잘못 죽였음을 알고서 노하여 하륜을 꾸짖기를,

나의 기()와 재()가 이제 무너졌구나.’라고 탄식하였다.

그러나 태종은 1416년 하륜이 죽자 매우 슬퍼하여 눈물을 흘렸고... ,

진산(晉山)은 충직한 신하였다. 나는 그의 덕망과 의리를 존중하여

항상 빈사(賓師)로 대우해 왔다."하였다고 국조보감(4)은 기록했으니,

그 말의 성찬은 어디까지가 진실일까?.

후일 세종은 왕명으로 성삼문(成三問)에게 차원부의 설원에 대하여 글을 짓도록 했으니,

그 기록이 연려실기술 제3권 세종조 고사본말(世宗祖故事本末)2수의 시로 전해져

그 자손 1천 년대에 전해지고 있다.

언덕[] 위에 바람 불어 집 기목[]이 기우니 / 原上風顚舍杞傾

반암(半巖)에 뉘가 있어 옛 쌍청(雙淸)을 보호하랴 / 半巖誰護舊雙淸

몇 구비 흘러가는 삼탄수(三灘水)/ 數灣唯有三灘水

오늘도 한결 같이 네 얼자(四孼子)를 꾸짖는 구나 / 一樣喧訶四孼生

정갑손(鄭甲孫 ?1451)은 시를 지어 차원부를 애도하기를,

매화는 매우 독한 자를 미워하여 오랜 동안 원망하였고 / 梅憎孤毒怨多年

국화는 세 흉한 자를 분하게 여겨 천만년 원통하리라 / 菊憤三兇痛萬千

하였다. 한 독한 자란 하륜을 가리키는 것이고,

세 흉한 자란 정도전과 조영규와 함부림을 가리키는 것이다라 하여

해동잡록(海東雜錄6)에 썼다.

천 년 세월이 흘러도 지워지지 않을 혈흔(血痕), 6백 년이 흐른 오늘

연안차씨 대동보(2004. 3)에는 이들에 대한 한()을 이렇게 기록해 놓았다.

차씨 멸문의 화를 입게 한 원흉이다(車氏滅門被禍之爲元兇者也)”

역사의 심판은 이토록 무섭고 냉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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