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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장(高麗葬)은 있었는가?
작성자관리자(test@test.com)작성일2013-12-04조회수1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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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장(高麗葬)은 있었는가?

 

 고려장(高麗葬)은 역사적 근거가 있었는가, 그 사실적 관계를 찾아보자.

고려장은 전근대 한국의 전통인 것처럼 알려져 왔다.

그러나 이러한 장례풍습은 존재하지 않았다.

고대 한국의 장례 풍속을 기록한 것 중 가장 오래된 문헌으로 삼국지 위서를 꼽는다.

동이전 고구려조에 보면 살아 있는 사람을 버린 후, 매장했다는 내용은 보이지도 않으며, 어느 문헌에도 이러한 기록이 없다.

지게에 지고 노모를 버린 아들이 다시 아비가 늙으면 져다 버린다 해서 깨닫게 된다는 이야기는 중국의 효자전(孝子傳) 원곡(原穀)이야기가 원전이다.

조선 후기의 학자 강봉문(姜鳳文:1735~1815)이 쓴 효자전은 효행에 대한 포상을 적은 것으로 이와는 크게 상반되고 있다.

또 하나는 중국 사신이 까다로운 문제를 내고 버려진 노모가 풀었다는 이야기는 인도의 잡보장경(雜寶藏經) 기로국(棄老國) 설화가 원전으로 되어 있다.

송나라 손목이 쓴 계림유사(鷄林類事)고려에는 노부모를 방에 가두고 음식을 넣어 주는 풍습이 있다.”라고 기술했다.

일부에서는 고려장과 관련이 있다고 주장하고, 한쪽에서는 치매노인이나 요즘처럼 역병에 걸린 사람을 집안에서 격리한 모습을 나타낸다고 반박한다.

고려도경(高麗圖經)에는 집안이 극빈한 자식이 부모의 장례를 지내지 못하고, 주검이 까마귀밥이 되게 하는 풍장 풍습이 나온다.

일부에서는 고려장과 관련이 있다고 주장하지만, 늙은 어버이를 죽도록 내다버렸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고려장(高麗葬)은 무덤을 가리키는 일반적인 명칭이었을 뿐이다.

조선이 개국하면서 유교가 국교가 되고, 명나라의 속국 입장에서 무자비하게 수입된 서책 중 이러한 내용이 고려장으로 둔갑, 소재거리가 되고 이는 사실인양 일반에 잘못 알려지게 된 것이다.

1713(숙종 39) 연행록에 고려장에 대한 첫 기록이 있으나, 이 또한 만족(滿族)이나 한족(漢族)의 무덤 형태를 상호 비교한 것이 전부이다.

고려장에 대한 이야기는 일제 때 일본인들이 우리 선조들의 무덤을 도굴, 골동품을 탈취하기 위해 날조해 퍼뜨린 측면이 강하게 나타나 있다.‘고려장 굴총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대한매일신보(19081111일자)에 있다. 일본인이 묘를 도굴한다는 내용의 이 기사는

고려장(高麗葬)은 무덤을 뜻하는 말로 일상용어로서 쓰였다. 그러나 이 또한 일제는 서서히 왜곡된 시각으로 바뀌어 갔다.

1919년 박문관이 펴낸 조선의 전설은 고려장 설화와 비슷한 불효식자라는 내용이 실려 있는 데, 평양고등보통학교 교사 미와 타마키(三輪環)가 썼다.

1924년 조선총독부가 발행한 조선동화집에도 부모를 버린 사내라는 제목으로 등장한다.

이어 1926년 나카무라 료헤이(中村亮平)가 정리한 조선동화집에도 일부 내용을 달리하여 부모를 버린 사내라는 제목으로 거듭 밝혀, 조선은 부도덕한 나라로 폄하했다.

은둔의 나라 조선’(Corea : The Hermit Nation)을 쓴 미국인 그리피스(William Elliot Griffis)1882년 판에 고려장(Ko-rai-chang)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그러나 그리피스는 조선에 온 적도 없다. 직접 취재한 내용도 아니다.

지리, 지명, 기후, 식물, 소금(巖鹽) 등 대륙으로 비정되는 내용이 넘쳐 조잡하기 이를 데 없다.

일본에 초빙되어 그들에게 들은 내용을 기술한 것으로 보아 일제가 사상 주입을 위해 얼마나 악랄했었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동 시대 인도의 시성(詩聖) 타고르가 일본에 왔다.

조상의 원류를 찾아 왔다는 때가 1929년 이니, 조선은 일제하의 암흑기였다.

일찍이 아시아의 황금 시기에/

빛나던 등불의 하나 코리아/

그 등불 다시 한 번 켜지는 날에/

너는 동방의 밝은 빛이 되리라/

그는 한국을 동방의 등불이라 했고, ‘동방의 밝은 빛이라고 표현했다.

일제에 신음하는 한민족을 가슴에 보듬어 안고 안타까워했다.

게오르규는 현대 사회에 있어서 한국은 많은 분야에서 모범이 되고 있다.

그 중의 하나가 노인에 대한 공경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25에서 또 한국은 나의 어머니의 크기, 나의 조국의 크기이다라 했다.

그리피스의 역사 기술과 비하 논리에 비교되는 대목이다.

우리의 선조들은 노인 공경을 어떻게 해 왔는가.

1014년 고구려 현종은 백성 중에 나이가 70 이상으로 관작이 없는 자(無官者)에게 모두 정위(正位) 계급을 주라했으며, 10대 정종은 1036자손 중에 벼슬이 없는 사람을 참작하여 초직(初職)을 주라는 기록이 고려사절요(3)에 보인다.

고려사절요는 또 1158년 고려 의종(毅宗)노인들에게 크게 잔치를 베풀었다고 썼다.

이로 보아 노인공경은 고대로부터 나라의 책무였으며, 미풍양속이었다.

1456년 세조는 ‘70 이상 된 노인들에게 잔치를 열어주고, 병이 깊은 상태이거나 폐질에 걸린 사람에게도 사는 곳으로 먹을 것을 보내주라고 명하였다.’고 국조보감(10)은 썼다.

이 외에 관, 민의 노인공경 예찬 기록은 헤아릴 수없이 많다.

고려 때 기영회(耆英會)라는 조직이 있었고, 조선조는 건국과 함께

기로소(耆老所)로 명칭을 바꾸어 고려시대의 풍습을 계승했다.

기로소는 정2품 이상의 문관 중 70세 이상 퇴임관리들의 예우를 목적으로 설치한 제도였다.

기로의 모임은 중국에서는 당. 송시대 부터 있었으며, 우리나라에서는 고려시대 신종, 희종 때 문하시랑을 지낸 최당(崔讜 1135-1211) 등이 관직을 물러난 뒤 조직한 것이다.

이 때 임금은 이들 신하에게 공경의 뜻으로 나라에서 지팡이()와 의자()와 가마 등을 주었다.

원래 기()라 함은 나이가 많고 덕이 높다[年高德厚]는 뜻을 지니고 있다.

나이가 70이 되면 기(), 80이 되면 노()라 한다.

나라에 경사가 있거나 왕이 행차할 때 서로 모여서 하례를 행하거나,

중요한 국사의 논의에 참여하여 왕의 자문에 응하기도 하였다.

고구려 20대 장수왕(長壽王)98세 수를 누렸고,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수많은 인재를 발굴한 최당(崔讜)76세에 세상을 떴다.

고려의 명신 강감찬(姜邯贊)83세였고, 문헌공도(文憲公徒)의 창시자인 최충(崔冲)84, 천추금경록을 쓴 정가신(鄭可臣)74, 삼국사기를 쓴 김부식(金富軾)76세의 수를 누렸다.

조선시대 명재상으로 불린 황희(黃喜) 정승이 89세를 사는 등 전 기간 동안 여기에 들어간 사람이 7백 여 명이었고,

이들을 기로당상관(耆老堂上官)이라 하였다. 기로소에서는 매년 상사(上巳)와 중양(重陽)에 보제루(普濟褸)에서 큰 잔치를 열었다.

이것을 기로연(耆老宴)이라고 했다.

효심 깊은 것은 우리민족의 기본 삶이다

부모님 모시기를 하늘과 같이하라, 너희 부모님은 하늘로 부터 왔으므로 부모님을 정성껏 모시는 것은 곧 하늘을 정성껏 모시는 것이라."

행촌 이암(李嵒) 선생이 단군세기에 기록해 남겨 놓았다.

군자불사지국, 동방예의지국으로 불린

하늘민족(天孫民族)에 고려장이라니 말이 되는가 ?

사회가 불안하다 해서 이에 편승하고, 부하뇌동 하는 일부 성직자의 무지가 교계(敎誡)를 더욱 불안하게 하고 있음이다.

역사의식도, 민족정신도, 자주의식도 없는 이들로 하여금 우리 역사는 또 한번 정체 당하고 있음이 아닌가.

당신이나 제발 동화 같은 고려장 터로 떠나시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한 술 더 떠서 아래와 같은 노래말로 우리를 더 비참하게 하고 있는가?

제발 인기에 영합하는 해괴한 노래말은 없어야 하겠다.

-한눌의 고대사 메모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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