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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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의공 흥도
작성자관리자(test@test.com)작성일2011-12-23조회수3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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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흥도공(興道公)

12世孫 諱興道公은 朝鮮初에 강원도 영월서 戶長이신 아버님 諱漢箸公과 어머님 原州原氏와의 사이에서 태어나셨습니다. 흥도공은 영월의 豪族으로서 그 先代부터 戶長(鄕職의 首長)을 지냈으므로 그곳의 戶長으로 계셨습니다.

당시의 世宗大王이 在位 23年만에 昇遐하고 병약한 文宗이 王位에 올랐습니다. 그러나 겨우 在位 2年여만에 昇遐하고 十歲때 長子世襲에 따라 1452年(端宗卽位年)에 寶位에 올랐습니다. 文宗임금은 어린 世子를 위해 重臣 皇甫仁, 金宗瑞 등에게 輔弼을 명하고 集賢殿의 成三問, 申叔舟 등에게도 부탁하는 遺言을 남겼습니다. 그러나 首陽大君은 1453年(端宗元年)10月 鄭麟趾, 韓明澮 등이 皇甫仁, 金宗瑞 등을 慘殺한 다음 1455年(端宗3年)6月 조카 단종임금을 上王으로 삼고 王位를 찬탈하였습니다. 이어서 1456年(世祖2年)6月 成三問, 朴彭年 등六臣의 端宗復位 음모가 김찬의 배신으로 탄로나 慘刑당하고 1457年(世祖3年)6月에 上王은 魯山君으로 降封되어 영월의 청령포에 流配되었습니다. 이때 嚴戶長은 임금의 動靜에 항상 관심을 갖고 있던차 어느날밤 울음소리를 듣고 괴이하게 여겨 江을 헤엄쳐 謫所에 이르러 魯山君을 뵈온 이후부터 밤마다 尋訪하였다 합니다. 그리고 江물이 불어 謫所를 영월읍내 觀風軒으로 옮긴 뒤에도 가까이 모시고 魯山君이 出帝宮詩를 지으시니 興道公께서는 그 次韻詩를 지어 節義를 다짐한 記事도 傳하고 있습니다. 이해 10月들어 錦城大君이 全南順興에서 魯山復位를 모의하다가 발각되어 魯山君은 庶人이 되고 10月 24日 영월에서 죽음을 맡게 되었고 그 屍身은 三族을 滅한다는 嚴命이 내려 東江에 던져졌다합니다. 三族을 滅한다는 嚴命이 있음에도 興道公은 『좋은 일을 하고 禍를 당해도 내가 달게 여기는 바이다(爲善被禍 吾所甘心)』라고 하면서 魯山君을 殮葬하고 곤룡포를 거두어 계룡산 동학사에 모신 후 깊이 숨었다고 합니다.

그 후 1669年(顯宗十年) 正月 右議政宋時烈이 經筵에서 『어지러운 時代일수록 節義를 더욱 崇尙함이 옳을 것입니다. 청컨대 嚴興道의 後孫을 찾아 錄用하여 世道를 진작케 해야 합니다』하고 進言하니 임금이 그 子孫을 찾아 錄用하라 하였습니다.

그 뒤 1698年(肅宗24年)에 전縣監申圭의 魯山君 復位上疏에 따라 魯山은 端宗으로 復位되고 노산묘는 莊陵으로 追封되니 노산이 영월에서 승하한지 241年만의 일이었습니다.

그해 1699年에 肅宗임금은 興道公에게 工曹佐郞을 추증하였으며, 1743年(英祖19年)에 工曹參議에 가증되었으며, 1750年(英祖36年)에 工曹參判에 가증되고, 1833年(純祖33年)에 工曹判書 가증되었고, 1876年(高宗13年) 11月 20日에 忠毅라는 시호를 받으셨습니다.

조국광복 50주년이 되는 1995년에 朝野의 名臣諸賢들이 公께서 남김 節義를 높이 평가하시고 莊陵 인근에 嚴興道忠毅公기념관을 건립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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